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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시집 『작약과 공터』 후기

안녕하세요? 뚱딴지네입니다. 파란 표지에 단순한 선화가 그려진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이 시집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웃프다"입니다. 웃기면서도 슬프고, 사소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그런 시집이에요. 지리멸렬(支離滅裂):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어져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 앞뒤가 맞지 않고 체계나 통

허연 시집 『작약과 공터』 후기

안녕하세요?

뚱딴지네입니다.

파란 표지에 단순한 선화가 그려진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이 시집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웃프다"입니다. 웃기면서도 슬프고, 사소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그런 시집이에요.

작약과 공터 — 허연2025문학과지성사

지리멸렬(支離滅裂):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어져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 앞뒤가 맞지 않고 체계나 통일성 없이 뒤죽박죽인 모양.

네, 바로 제 인생 얘기입니다. 😅

모든 게 지리멸렬하게 흩어져 있는 제 일상과 너무 닮아서 괜히 반가웠습니다.

누군가 내 삶에 이름을 붙여준 느낌이랄까요.

캠핑장에 나타난 길고양이 '에코'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읽을수록 피식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어딘가 씁쓸합니다.

트램펄린 타다 휴대전화가 궤도를 이탈하고, 돈 빌려간 친구는 차를 바꿨고,

캠핑장 직원은 "개인 난로 쓰면 사망할 수 있다"고 외치고 다니는 상황들.

"다들 이렇게 살고 있구나" 하는 이상한 위안이 됐달까요.

"엄마랑 같이 걷는 거 창피하지?"

학생주임에게 불려와 혜화동 동양서림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던,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

소년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고, 그날 밤 잠든 머리맡으로는 "깨진 음표 같은 게" 쏟아져 내렸다고 합니다.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을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였어요.

한탄강은 여섯 살, 돌림병에 걸린 엄마와 미군 부대를 다니는 아버지 사이에서 남의 집에 맡겨진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전기도 없고 빈대가 무는 방에서 물 말은 밥을 먹으며, 그 어린 아이가 매일 생각했던 것은:

"사는 게 나을지 죽는 게 나을지를 생각했다 / 여섯 살이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저는 책을 잠깐 내려놓아야 했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여섯 살짜리가 이런 생각을 품고 살았다는 게 너무나 가슴이 먹먹하고 아팠거든요.

우리 아이가 여섯 살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떠올리면, 그 나이의 아이가 삶과 죽음을 저울질했다는 사실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수사 하나 없이도 이렇게 깊은 상처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처가 반세기가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는 것.

나이를 먹어 갈 수록 이런 시가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총평

『작약과 공터』는 예쁘고 달콤한 시집이 아닙니다.

대신 삶의 가장 거칠고 지리멸렬한 구석들을 아주 정직하게 들여다봅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기보다는, 오래된 감정의 먼지가 툭 털리는 느낌이에요.

지리멸렬하게 살아가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사소한 하루도 충분히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시집이 조용히 알려줍니다.

일상의 사소함과 깊은 성찰이 공존하는 이 시집은, 우리네 찌질하고 팍팍한 현실을 문학으로 승격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기분 좋게 우울해지고 싶을 때 꼭 꺼내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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